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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문화

[궁궐 나들이] 조선 5대 궁궐에 대해 알아봅시다.





조선 5대궁궐에 대해 알아보자!

최근 궁중문화축전이 그 막을 열었습니다. 서울의 궁궐들이 총 집합한 문화 행사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과 함께 궁궐 나들이를 가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런데 궁궐들의 이름이 비슷비슷해 어느 궁궐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헷갈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5대 궁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보았습니다! 덤으로 각 궁궐들의 정전(왕이 조회를 보던 건물) 이름들도 함께 넣어 보았으니, 상식으로 기억해 두고 나들이를 간다면 더욱 재미있는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http://www.pixbay.com) / 저작권자 :Heartywizard , 상업적 용도로 사용가능, 출처 안 밝혀도 됨)

경복궁-근정전(勤政殿)

우리나라 국민 중에 경복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대표적 궁궐입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법궁이기도 했습니다. 법궁이란 임금이 거처하는 정식 궁궐을 뜻합니다. ‘경복이란큰 복을 누리다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지은 것입니다. 조선 개국 3년 뒤인 1395년에 태조 이성계가 건립했으니, 조선의 역사를 함께한 궁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전은 근정전으로, 근면한 정치를 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경복궁에 실제로 왕이 거처했던 기간은 의외로 길지 않습니다. 임진왜란(1592) 때 모조리 불에 타버려 복구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경복궁의 주요 건물만이라도 복구하고자 했으나, 워낙 규모가 큰 공사라 대신들의 만류로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전쟁으로 불 탄 궁궐이 경복궁 한 채뿐이 아니었거든요. 결국 270년이 지나 흥선대원군이 중건(절이나 왕궁따위를 보수하여 고쳐 짓는 것) 작업을 한 후에야 경복궁은 다시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경복궁 안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누각인 경회루가 있습니다. 경회루 자체로도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데요, 경회루와 그 아래 연못을 만들기 위해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쌓아 올렸습니다. 흥선대원군 때에 중건되어 지위 회복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뒤로도 경복궁은 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중건 후 고종과 명성황후가 들어와 살았지만,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고 경복궁은 다시 주인 없는 궁궐이 됩니다. 또 일제 시대 때 창덕궁에 화재가 났을 때에는 경복궁의 건물들을 헐어 그 목재로 보수를 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경복궁은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것입니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조선의 법궁이자 대표적인 궁궐로서, 또 조선의 역사를 함께한 궁궐로서 경복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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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은 가장 조선적인 궁궐이라는 말을 듣는 궁입니다. 비록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궁궐들에 비해 가장 많은 부분이 보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또 건축 특성상으로도 한국적 정서와 사상이 깊이 스며든 궁궐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인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지요. 태종 즉위 후 지어진 창덕궁은 이 궁(별궁이라고도 하며, 임금이 바깥에 나갈 때 머무는 궁)으로 지어졌습니다. 추후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어진 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불립니다. 창덕궁의 정전은 인정전으로, 인자한 정치를 편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창덕궁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버렸는데요, 경복궁과 달리 선조 때 바로 복구가 시작되어 광해군 때에 거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또 화재가 나 건물들이 소실되긴 했지만요. 완전한 복구는 인조 대에 들어서야 이루어집니다. 방금 창덕궁과 창경궁을 가리켜 동궐이라고 한다고 한 점 기억하시나요? 위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경복궁은 일제시대에 가까워져서 중건되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조선의 법궁 노릇을 했던 게 바로 이 동궁입니다. 그리고 광해군 때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이 지어져 이 궁으로 쓰입니다. 정리하자면 본래는 법궁(경복궁)+이 궁(동궐)의 조합이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광해군 때부터 법궁(동궐)+이 궁(경희궁)의 조합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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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명정전(明政殿)

가장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궁궐이기도 한 창경궁은 성종 때에 지어진 궁입니다. 기존에 있던 창덕궁 담장 옆으로 확장하여 지어진 궁입니다. 성종이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궁궐은 이후에도 왕실의 어른들이 거처하는 장소가 되어의 상징과도 같은 궁궐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불립니다. 워낙에 서로 딱 붙어 있다 보니 하나의 궁궐처럼 묶어 부르는 것이지요.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밝은 정치를 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지요. 창경궁 또한 앞의 두 궁궐과 다를 바 없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지만, 광해군 때에 복원되어 창덕궁과 함께 법궁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화재가 빈번히 일어나곤 했다고 합니다. 창경궁이 본격적으로 추락한 것은 순종이 즉위하고 난 이후입니다. 일제가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끌어내린 후 즉위한 것이 순종이었는데요, 당시에는 이미 국권이 거의 일제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창경궁의 건물들을 헐어버린 후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한 나라의 궁궐을 대중의 구경거리로 격하시켜버린 것이지요. 정원들 또한 일본식으로 바꾸어버렸고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다 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광복 후에도 이러한 상태로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던 창경궁은 1980년대에 창경궁 복원 사업을 맞이하여 원래의 모습을 일부분이나마 되찾고, 그 이름 또한 창경궁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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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중화전(中和殿)

돌담길이 유명한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사실 경운궁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기간이 훨씬 더 긴 궁궐이지요. 경운궁으로 불리던 시기의 일에 대해서는경운궁으로 표기하고, 덕수궁으로 불리던 시기의 일에 대해서는덕수궁으로 표기하겠습니다. 경운궁은 다른 궁궐들과는 그 기원이 조금 다릅니다. 개인의 거처를 궁궐로 개조한 궁궐이기 때문인데요, 본래 이곳은 월산대군의 개인 자택이었습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님입니다. 세조의 첫째 손자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본래는 왕위를 물려 받았어야 할 인물이었지만 정치적 사정으로 둘째인 성종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이 월산대군의 집, 즉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는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피난길에서 돌아와 거처한 장소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당시 조선의 법궁과 별궁이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전쟁 중에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선 대군 가에 머무르며 정무를 보았고, 이에 따라 이 장소는 정릉동행 궁(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이라고 불렸습니다. 나들이를 위해 머물렀던 것을 아니지만요. 선조는 이후 죽을 때까지 여기에 머물렀고, 광해군 또한 이 장소에서 즉위를 합니다. 위에서 광해군 이후로 법궁이 동궐이었다고 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경운궁에서 즉위 후 창덕궁의 보수가 끝나자 그쪽으로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광해군이 거처를 옮긴 후 경운궁은 크게 부각되는 일 없이 역사 속에 편승합니다. 광해군의 하야 원인 중 하나였던인목대비 유폐 사건당시 인목대비가 경운궁에 유폐됐던 일을 제외하면, 크게 부각되는 일이 없던 궁궐이었지요. 그러다 고종 대에 와서 다시 궁궐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되는데요, 고종이 경운궁에서 거처하게 된 것이 그 계기입니다.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피신 생활이 끝나고 돌아온 궁궐이 바로 경운궁이었습니다. 피신 생활 도중부터 이미 태후와 태자비가 경운궁에 머물고 있었기도 했지요. 조선 5대 궁궐의 정전들 중 유일하게 가운데에()’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바로 덕수궁의 중화전입니다. 이는 왕에서 황제로 바뀌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제는 조선이 아닌,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이지요. 황위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고종은 그대로 경운궁에 남습니다. 이 때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궁궐의 이름을덕수궁으로 바꾼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명칭이지요. 덕수궁은 이처럼 개인의 거처를 개조한 궁궐이라 정형된 누각의 구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석조전'과 같이 서양식 건물도 축조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궁궐들과는 조금 다른 구조 양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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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숭정전(崇政殿)

광해군 때에 지어진 궁궐로, 처음 명칭은 경덕궁이었습니다. 경복궁이 없을 때에 법궁이었던 동궐과 함께, 이 궁으로서 기능했던 궁궐이지요. 경희궁이라는 명칭은 인조 때에 붙여진 것입니다. 사실 경희궁이 세워진 자리는 인조의 아버지가 살던 잠저(왕세자 같은 정식 후계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가 있던 곳입니다. 당시에는 풍수지리가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요, 이 장소에 왕기가 서렸다면서 광해군이 궁궐을 지어 올린 것입니다. 순조 때에 화재로 소실됐었지만 2년만에 복원됩니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숭고한(높은) 정치를 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경희궁은 일제 시대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에는 남은 건물이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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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조선의 5대 궁궐은 아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곳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운현궁은 사저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사저였지요. 하지만 대원군 집권 당시 궁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장소였습니다. 고종이 자란 곳이기도 하며, 조선의 정치가 이루어지던 곳입니다. 소설가 김동인은 대원군과 운현궁을 소재로 소설 <운현궁의 봄>을 집필하기도 했지요. 고종이 자라며의 호칭을 하사한 것인데요, 고종이 있는 창덕궁과의 왕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흥선대원군 전용의 문이 만들어졌을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격변의 조선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