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트렌드

[박영석 대장/산악인]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 - 산 사나이 박영석, 산에서 잠들다.


산악계의 큰 별이 졌습니다.

새로운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나섰던 한국의 산악인 박영석 대장님이 이끄는 원정대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돼 지난 10월 19일부터 수색작업을 펼쳤는데요. 대한산악연맹의 열흘간의 수색에도 불구, 박영석 대장님의 일행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수색작업은 중지되고, 10월 30일 박영석 대장 및 그 일행(강기석, 신동민 대원)을 위한 위령제가 네팔 현지에서 치뤄졌고, 11월 1일부터 서울대학병원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오늘은 합동 영결식이 열리는 마지막 날.....



지난 20일, 박영석 대장 원정대가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로프가 발견돼 눈사태를 맞은 것이 아닐까란 설이 이제 거의 기정 사실화가 됐습니다. 실종된 지 시간이 꽤 흐른 상태라 많은 사람들이 '산악인은 산이 계속 부르기 때문에 산에 묻힐 수 밖에 없다', '山인은 山에 살고 山에 죽는다' 등의 말을 하며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산악계에 따르면 히말라야 고봉 근처에서 실종된 산악인을 찾는 데 현지에 잔류한 산악인들이 아니라 자국 구조대가 조직돼 열흘 가까이 수색을 벌인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합니다.
네팔정부도 이번 사안이 특수하다고 판단했는지 박영석 원정대 구조위한 수색대원들에게 허가 및 거액의 입산료 등의 규제를 열외로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영석 대장 일행(신동민,강기석 대원)의 생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추정위치는 남벽 출발점 근처의 설사면과 눈더미, 남벽과 빙하가 맞닿은 부분에 형성된 거대한 틈(베르크슈룬트), 남벽출발점에서 캠프쪽으로 가는 길의 크고 작은 크레바스 등인데요. 27일, 언론에 따르면 베르크슈룬트의 밑바닥 까지 뒤졌지만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 크레바스(Crevasse): 빙하나 눈 골짜기에 형성된 깊은 균열이다. 벽면은 수직으로 1~2m 정도의 틈이 형성된 것이다. 벽면 하부는 눈이 압축돼 굳어진 빙장을 이룬다. 밑바닥까지의 거리는 10m 전후로 얼음이 녹은 물이 흐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로프나 사다리를 건네줘 넘으며 낙하 대책으로 암벽 등산과 그 장비를 필요로 한다.  

 

 

 비록 山사람은 山에 안기는 게 숙명일지라도 그가 하루빨리 산에서 내려올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산 인생을 거슬러올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 그가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른 이유


 히말라야 최단기간에 최단 등정, 한국 산악사를 빛낸 위인 등 그의 이름을 꾸미는 수식어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산' 그자체가 인생이었다.  2005년, 인류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산악계의 그랜드슬램은 세계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세계 3극점을 모두 등반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최고의 기록이다. 명실공히 인류 역사에 남을 위대한 기록을 달성한 박영석 대장은 2005년 2월 24일 당시 한국을 출발해 3월 9일 본격적인 탐험 길에 오른지 54일만에 예정일보다 6일을 앞당겨
북극점에 도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하 40~60도를 왔다갔다하는 혹한 속에서 1500km를 54일, 그것도 100kg이 넘는 무게를 짊어 매고 그들은 북극점을 밟은 것이다.


이쯤 되면 여기에 만족할 법하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2006년 봄, 에베레스트 횡단등반에 성공하고 2007년 초 베링해협 횡단에 나서는 가 하면, 2009년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는 히말라야 14개 거봉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현재 안나푸르나에 안긴 상태다.



 

 그는 지난 달 19일, 히말라야 14좌(8,000m 이상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안나푸르나 남벽(8,091m)을 무산소 단독 등반하기 위해 네팔 카트만두로 출국했었다. 그의 계획은 보조 산수기구나 고정된 로프를 쓰지 않고 셰르파의 도움없이 지금까지 아무도 오르지 않은 길로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는 것이었다. 이번 원정이 성공했더라면 안나푸르나 남벽에는 영국루트와 일본루트 사이에 한국루트가 개척되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등반은 이른바 '알파인' 방식으로 캠프 설치 없이 한번에 등정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 등반에 해당한다.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등반을 시도하는 산악인 대부분이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하는 등정주의라면, 박대장의 등반 방식은 홀로 히말라야 대자연과 맞서야 하는 위험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 14좌 가운데 등정자가 가장 적을만큼 험난한 봉우리다. 남벽은 길이가 3500m에 달하고 해발 5000m, 전진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눈이 쌓이지 않을 정도로 가파른 암벽이 2000m나 이어진다. 2009년 에베레스트를 남서벽 신루트로 등정한 박영상 대장은 지난해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에 도전했으나 기상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올해 재도전에 나선 것이다.

안나푸르나 Annapurna. 8,091m

네팔 중북부에 자리잡은 히말라야 산맥의 산지.세계 10위의 고봉이다. 산스크리스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칼리간다크 강 유역과 마르시안디 강 유역 사이의 48㎞에 걸쳐서 능선을 이루고 있다. 4개의 주요봉우리들 가운데 안나푸르나 제1봉(8,091m)과 제2봉(7,937m)이 각각 산지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제3봉(7,555m)과 제4봉(7,525m)이 그 사이에 위치한다. 안나푸르나 제1봉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해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루트 등정 후


그가 2009년, 코리안 루트를 개척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해발 6500m의 웨스턴쿰 빙하에서 8848m 높이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약 2400m 높이로 치솟아 있어 히말라야 거봉의 수많은 등반로 중 가장 험난하다는 평을 듣는 벽이다. 바위와 얼음, 눈이 뒤섞인 남서벽에 길을 낸 것은 75년 영국 부닝턴 원정대와 82년 구소련 원정대로 단 2 팀에 불과했다. 특히 보닝턴 팀은 18명의 세계적인 산악인을 비롯해 108명이 참갛나 대규모 원정대였고 구소련 팀은 27명의 막강한 대원으로 구성된 원정대 였던 것에 비해 박영석 팀은 단 대원 5명과 셰르파 7명의 소규모 원정대였다는 점에서 코리안 루트 개척은 더욱 값지다.





그에게서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한(恨)'이었다. 91년 첫 도전 때는 해발 7000m 대 벽에서 100m나 추락했다. 이틀간 의식을 잃을만큼 큰 사고에서 그는 다행히 헬기로 긴급 구조됐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93년, 다시 도전했다. 동국대 단일 대학 산악부 원정이었다. 그는 그 등반에서 막판에 장비가 모자라 남서벽 등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나 남동으로 루트를 변경해 국내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후배 대원 2명이 추락사하는 비극을 겪고야 말았다.

이후 박영석의 에베레스트에 대한 집착은 계속 불타올랐다. 1996년에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긴 북동릉에 도전했지만 불운은 계속됐다. 이 도전으로 사다(우두머리 셰르파)가 사망했고 박영석 역시 갈비뼈 부상의 결과를 빚었다.

 

 

 



그렇게 에베레스트 열기가 사그라 드나 했지만 2006년, 산악 그랜드슬램에 성공해 또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해 횡단등반에 성공하자 다시 남서벽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도 그동안 도전했던 보닝턴 루트가 아닌 신루트로였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한국인의 길을 내고자 하는 꿈에서였다. 그러나 남서벽은 쉽사리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2007년, 첫번째 도전때는 제 4캠프(7900m)에서 머물던 대원 2명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에 텐트가 무너져 1300m 아래 설원으로 추락했다. 사고를 당한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5년 넘게 히말라야 등반과 극지탐험을 함께 해온 혈육과 같은 후배들이었다. 그는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산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어느날, 그는 다짐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다시 오르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결국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 하지 않는다"

그는 2005년, 북극점에 도달하면서 말했습니다.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그대로 행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번 실종으로 긴급 파견된 수색대들 역시 그의 이러한 신념을 마음 깊이 되새기며 샅샅이 그를 수색했다고 합니다. 비록 눈사태로 인해 눈 속에 파묻혔을 경우 ▲ 1시간 이내에 살 수있는 기회 80 % ▲ 1시간까지 살 수 있는 기회 40 % ▲ 2시간까지 살 수 있는 기회 20 % ▲ 3시간까지 살 수 있는 기회 10 % 라고 하지만, 혹시나 일말의 1%의 희망은 놓치지 않기 위해 말입니다.


진정한 山악인인 박영석 대장님은 안나푸르나 절벽에서 그의 삶을 묻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죽음이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차피 목숨은 하나뿐이고

죽고 사는 건 팔자라고 생각해요.

떨어져 죽을 팔자라면 히말라야에서가 아니라

자기 방 침대에서 자다가도 떨어져 죽어요.

가장 무서운 건 나 자신이죠.

나를 이기는 게 제일 힘들어요. "

죽음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인내를 가르쳐주었던 박영석 대장님,
삼가 고인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