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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트렌드

[한글날/뿌리깊은나무]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세종대왕)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한 이유


"왜 한글날은 빨간 날이 아닌가요!!!"

10월 9일이 다가오면서 볼멘 목소리가 종종 들려옵니다. 빨간 날은 아니지만 '한글'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한번 마음 깊이 새길 수 있는 날이 바로 한글날입니다. 하지만 왜, 10월 9일이 한글날로 지정이 됐을까요?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을 한글이 반포된 날로 추정하여 '가갸날'로 정했다고 합니다. 즉, 정확히 10월 9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강의 추정으로 1928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조선어연구회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해 기념식을 가지고 이날을 제 1회 가갸날로 정한것이 시초가 된 것이죠~

 

요새들어 한글에 대한 소중함을 수많은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맹률은 세계최고로 낮지만, 문해율(실질 문서를 해독하는 능력) 역시 바닥을 기고 있는 아이러니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글자는 읽을 수 있지만 책 한권을 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이죠. 어쩌면 문자가 너무 쉽기 때문에 나타나는 부작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우려는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때 가장 큰 반대를 했던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나와있습니다.
다들, 국어시간에 한번쯤은 아래와 같은 최만리의 상소문을 접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 최만리 상소문 중 일부 -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던 이유가 위의 상소문 내용대로 1) 중국을 사대하는 입장에서 이는 도리가 아니다 (사대주의에 어긋난다) 2) 그 나라만의 글자를 가지는 것은 오랑캐만이 하는 것 3) 이두의 존재 4) 백성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있어선 문자를 모름과는 상관이 없음 5) 쉬운 글자로 인해 모두가 학문을 게을리 할 것을 우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상수 홍익대학교 교수 작. ‘피어랏. 한글’



 
5번의 경우에서 약간 갸우뚱 하지 않나요? 문자가 쉬운데 왜 학문을 게을리하는지 하고 말입니다. 옛날의 학문은 그 많은 한자를 하나하나 익히는데서 공부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훈민정음처럼 쉬운 문자가 나오고 이후로 한자가 소홀히 된다면 그만큼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었죠. 저 역시 여기엔 살짝 공감을 합니다. 실제로 문맹률과 문해율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국민들은 너무나 쉽게 문자를 익혀왔기에 '국어공부는 쉬운 것'이란 생각으로 책읽기나 국어를 방관합니다. 실제로 초,중학생때는 국어공부를 딱히 안해도 교과서만 달달 외워도 잘나왔기 때문에 게을리하다가 고등학교 올라와서 '언어영역' 시험을 한번 치르고 나면 "언어는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안된다"며 불평을 늘어놓고 말죠.
사실 알고보면 어릴 때부터 꾸준히 책을 읽거나 해왔다면 '문해율'은 자연스레 길러졌을텐데 말입니다.




어쩌다보니 제 주저리가 길어졌네요. 어쨋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수많은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이는 최근부터 방영하기 시작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시면 실감이 갈 겁니다. 비록 픽션이지만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실제론 책 <뿌리깊은 나무>가 원작이죠.

 



저도 1, 2화를 봤었는데 무려 송중기 씨가 어린 세종(이도)더라구요! (세종의 이름은 '이도'입니다) 이도는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의 수많은 학살 등 콤플렉스를 가졌지만 머리만은 천재적인 사람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언어학적 지식이나 다른 여러방면에 능통했다고 하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다르게 세종대왕은 그저 인자하고 착하디 착한 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꽤 많습니다. 오죽하면 '훈민정음 창제'에만 몰두하고 정치는 소홀히 했다는 설도 있다죠?

그럼 대체 왜? 세종대왕은 수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을까요?

훈민정음 서문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세종대왕의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로 시작되는 훈민정음에 의하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어도 '글을 몰라'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통 수단이 적었습니다. 물론 신문고란 제도로 억울한 사람들은 북을 두드려 고(告)하게 하는 제도도 있었으나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였죠.

아래에서 위로 가는 소통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가는 소통에서도 문제가 됐습니다. 국가에서 어떠한 정책을 발표했는데 백성들이 글을 몰라 그 정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국가입장에서도 그것은 큰 골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훈민정음은 애민정신과 더불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기 위해 창제됐다는 설이 지금 현재 가장 유력합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 비록 픽션이지만 세종대왕은 앞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학사들을 잃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애민정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책 <뿌리깊은 나무>를 본지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호남향우회 티를 입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글자가 너무 쉬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작 소홀히 하지만 외국인들의 눈엔 여전히 '아름다운 문자'입니다. 유명 팝스타가 '호남향우회'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다닌다던가 하는 것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쨋건 그 문자가 멋있어 보여서 입은 것이겠지요.

우리 한글은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유산입니다. 왜 세종대왕이 그토록 힘든 난관을 넘어 우리 글을 만들려고 했는지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아차! 일반적으로 쓰이는 '굴림체'는 일본에 의해서 제작된 폰트란 거 알고 계시죠?
기본 글꼴을 맑은 고딕이나 나눔글꼴 체 써주는 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