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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문화

시인열전(詩人列傳) - 봄 시에서 겨울 시까지









바람과 봄

 

                                    김소월

 

봄에 부는 바람,바람 부는 봄,

적은 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바람,

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 부는 봄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 

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 진달래 꽃 떨어지듯 스러진

시에 대해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김소월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아마 들어 보셨을 겁니다. <진달래꽃>을 비롯해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시인이지요. 그런데 김소월이 그의 본명이 아니란 것은 아셨나요? 평북에서 태어난 평범한 농민의 아들 김정식이 바로 우리가 아는 김소월입니다.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한()을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러나 시에서 드러난 한의 정서가 비단 남의 이야기였던 것만은 아니었나봅니다. 그 자신 또한 33세의 젊은 나이에 음독 자살로 진달래 꽃이 스러지듯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의 유년기가 썩 화창한 편이 못 되긴 했습니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와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받은 집단 폭행으로 인해 폐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는 언제나 김소월의 기억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거든요. 그런 그를 문학계로 인도한 두 명의 스승이 있었으니, 하나는 숙모 계희영이었고, 하나는(우리도 알고 있는) 김억 선생입니다. 계희영은 유년 시절의 김소월과 가깝게 지내며 그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의 전래 동화들을 틈날 때마다 들려주었는데요, 이것이 훗날 김소월이 <접동새>와 같은 시를 쓰는 데에 한 몫을 하게 됩니다. 김억 선생을 만난 것은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고 오산학교로 진학한 이후입니다. 여기서부터 김소월은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돌입하게되고, 활발히 활동을 해나갑니다. 그러다 동아일보사의 지국을 경영하지만, 천성적으로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할 인물은 못 되었던 그는 곧 파산하고 맙니다. 이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결국 음독 자살로 서른 셋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김소월의 소월(素月)밝고도 빛이 흰 달을 뜻합니다. 흴 소()에 달 월()자를 쓰지요.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시는 아니지만, 담담하고도 소박하게 우리 민족의 한을 나타낸 그의 시와 꼭 닮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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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여름 : 불모의 광야에서 피어난 꽃

천지가 개벽하는 역사의 현장에 서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단군 이래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격동의 시대란 먼 이야기인 듯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남겨 놓은 여러 작품들을 통해 그 때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는 있지요. 작품들에는 영화, 소설, 그림 등 다방면의 예술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번 주제가 시인열전인 만큼 시로써 그 현장을 느껴보려고 합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입니다. 퇴계 이황의 자손이었던 만큼 그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께 한학을 배우는 등,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던 중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에 비탄을 느끼고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수 차례 옥살이도 지내게 되는데요, 그 당시 그의 죄수 번호가 264였다고 합니다. 이육사라는 가명은 여기서 비록된 것입니다. 독립투쟁에 인생을 내던졌던 만큼 그의 시에는 독립에 대한 염원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독립 염원 시들 중에서도 그의 시는 특히나 남성적이고 웅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청년 시인 윤동주와 곧잘 비교되는 것도 이러한 부분이지요. 하지만 그는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해방 1년 전인 1944년 중국의 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여름의 시로 여러분께 소개한 것은 <청포도>라는 시입니다. 내리 쬐는 여름 햇살과 두 손을 적시는 청포도의 푸른 빛이 7월의 느낌을 물씬 풍기지요. 독립에 대한 그의 염원이 한여름 뜨거운 햇살처럼 피부로 느껴질 듯합니다.














코스모스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가을 : 별을 헤는 영원한 청년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동주>를 기억하시나요? 사람들에게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영화였지요. <동주>의 주인공, 별과 부끄러움을 노래한 청년 시인 윤동주를 가을 시로 만나볼까요? 사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일제 시대에 출간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창작을 일제 시대 때 하기는 했습니다.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썼던 시들을 졸업반이 되었을 때 시집으로 엮어 교수님께 출판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그의 시를 읽어본 교수는출판을 보류하라는 조언을 합니다.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도 힘들 뿐더러 자칫하다가는 윤동주의 신변조차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그는 당대에 눈에 띄는 독립 투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민족의 현실에 고뇌했고, 이를 시로서 승화시키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세상을 버리는 것은 겁쟁이의 도망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며 윤동주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현실에 용감히 맞서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고민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동시에 느껴집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날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겨울 눈 내리는 날 사랑을 기다리다

첫 눈에 반한 여성을 와락 끌어 안으며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야라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읊은 시인이 있습니다. 바로 백석입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백석에게 평생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녀의 이름은 김영한. 김자야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자야(子夜)라는 이름은 백석이 이백의 시에서 따와 붙여준 이름입니다. 함흥의 한 여고 교사였던 백석은 당시 준수한 외모와 천재적인 시적 재능으로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회식자리에서 만난 김자야에게 한 눈에 반해 이런 식으로 사랑을 맹세한 것입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이었던 김자야와의 사이를 허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연인은 3년 간의 짧은 동거를 합니다. 결국 집안의 강요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던 백석은 결혼 첫날밤 집에서 도망쳐 나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피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자야는 자신 때문에 백석의 창창한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싶지 않다며 이를 거절합니다. 백석은 만주로 떠나 자야를 기다리지만, 자야는 결국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백석은 함흥으로 돌아가지만 당시 자야는 서울로 떠난 뒤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석을 떠나 보낸 후 자야는 우리나라 3대 요정(料亭)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그러나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이를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하고, 이것이 바로 지금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입니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긴 자야는내가 죽으면 화장해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왜 눈 오는 날 뿌려달라고 했는지는 위의 시를 읽으면 예상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즘의 날씨를 보면 철겨운 감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랑은 봄볕만큼이나 따뜻하답니다.